오락실 기판

스트라이더 비룡, 가슴에 돋는 기억을 칼로 자르고

매드 포엣 2025. 4. 4. 16:57

 


1989년에 발매한 캡콤의 게임이다. 후지와라 토쿠로의 제1 개발부의 작품이었고, 대마계촌과 거의 동시에 개발한 것으로 보이며, 릴리즈 역시 대마계촌 다음 작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마계촌의 다음 시리즈인 슈퍼패미컴 초마계촌 제작에 스트라이더의 기믹이나 디자인이 많이 들어가 있다.

영화 공부를 하던 디렉터, 코우이치 요츠이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화같은 연출에 시원시원하고 자유도 높은 액션이 특징이다.

나는 이 게임을 처음 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속초 중앙 초등학교에서 중앙시장으로 내려가는 길 오른편에는 어릴 적부터 오락실이 있었는데, 멀어서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다. 고교시절 시험 때문에 일찍 하교한 어느 날, 단짝 친구와 집까지 속초를 횡단하다 근처에서 분식을 먹고 들어갔었다.

그즈음의 지방 오락실에는 별다른 변화없이 정체된 상황, 특별한 게임이 하나 정도 있으면 다행이었는데, 놀랍게도 못 보던 캡콤의 게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게임은 캡콤 특유의 디자인 센스와는 조금 다른 극화체의 일러스트가 눈길을 끌었다. 곧장 동전을 넣고 게임을 했는데, 조작감부터 게임의 알고리즘이 여태 본 적 없는 정말 특이한 게임이었다.

솔직히 몇 번 끔살 당하고는 금방 흥미를 잃고 오락실을 떠났다. 말했듯 학교에서 정반대 위치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갈 길이 멀었다. 물론 그 시절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다양한 장르의 신기한 문화를 접하고 있어서 오락실 게임에 대한 애정이 많이 식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날 나는 친구와 걸으며 비디오로 복사한 만화영화 아키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해적판 만화 북두신권,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 가이버, 구호 본격 성인 만화 대남, 대룡 같은 것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쩌면 혼자 극장에서 보고 뻑이 갔던 천녀유혼, 혹은 데이비드 린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컬트 영화, 아니면 소설 엘러리 퀸의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세상은 너무 많은 이야기와 신비를 담고 있어서 매일매일이 즐거웠으나, 그만큼 새로운 담론들이 질식할 정도로 차오르면서 자신을 되짚고 고민하는 독한 사춘기가 찾아왔다. 그러니까 내게 오락실 게임은 단순하게 기술적으로, 혹은 가치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존재다. 나를 구성하는 다른 수많은 요소들과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만나서일까 잠깐 스쳐갔으면서도 뚜렷하게 남았다. 게임과 상관없이 그 시간이 내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다시 되새긴다. 그날 난 인생에 둘도 없는 친구와 길을 걸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길을 둘러쌓던 선선한 바람과 풍요로운 푸른색의 나무들을 기억한다. 차도 옆 좁은 인도 길을 한참을 말없이 걷기도했다. 박식한 그 친구와 논쟁으로 밤 10시에 하교해, 새벽 2시까지 싸운 적도 있다. 그 바람에 두 집이 발칵 뒤집혀 새벽에 우리를 찾아 난리가 나기도했다. 온갖 다양한 주제에 최선을 다해 토론하며 세상의 이치와 옳고 그름을 서툴지만 진지하게 쫓았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지만, 이기기 위해 쓰잘대기 없는 것들을 공부하고 파고드는 습관은 이후 내 삶의 방향과 태도에 많은 도움이 됐다.

기판은 작년에 구매했다. cps1 초기작으로 상당히 희귀한 기판이었다. 몇 년 동안 고장 난 기판도 몇 번 못 만났는데, 그런 정크라도 사서 고칠까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상태가 아주 좋은 놈을, 고장난 기판 수준의 싼 가격에 구했다.

그러나 이 오리지널 기판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게임의 알고리즘이 시대를 앞서간 만큼, 여러 버그가 생긴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각 스테이지의 bgm이 제대로 연주되지 않고 첫 번째 스테이지의 음악이 반복 재생 되는 문제다. 그 문제는 최후에 발매된 리테일용 기판에서 수정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그래픽적인 문제가 있는데 끝까지 수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열성 서양팬이 수정한 롬데이터가 있기는 하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초기판이 무조건 더 가치 있다고 떠드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역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는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리마스터된 닌자 가이덴 2와 닌자 가이덴 2 블랙을 다시 즐겼다. 이타가키 토모노부의 게임사에 남을 위대한 액션게임이다. 놀랍게도 이 게임에 스트라이더 비룡의 흔적이 있었다. 아크로바틱 한 액션신에 비슷한 스테이지들, 거대 비행선과 정글의 디자인이 특히 그렇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추억을 따라 기판을 구매했다. 그러나 그 추억은 게임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 번 스쳐갔던 게임도 이렇게 얽혀있듯 어떤 것도 홀로 설 수 없다.

이 기판을 통해 지나간 계절을 회상 해서 좋았다.

그날 그 오락실에 들르기를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