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게임의 마지막 샷
그냥 숙제처럼 게임을 했던 것 같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도망갈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게 쉴 곳이었을 수도 있다. 책과 영화,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그걸 즐기는 시간에는 내가 왠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어떤 창작물을 만나던 그걸 만든 사람에 대한 이해와 결국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대한 존경심이 동시에 생긴다. 창조의 위대함, 그건 무엇이든 만들어 본 사람이면 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존중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몇 년 전에 같이 운동하던 후배가 자살했다. 강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제였다. 녀석이 무엇인가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단 건 알고 있었다. 병마가 아끼는 사람을 앗아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밝고 강한 사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내가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은둔하다시피 한 나를 찾아 준 사제였다. 물론 그 녀석 역시 자신이 방황하고 있을 때 내가 길을 찾아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겠지만... 우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렇게 전원을 내려 게임을 끝내듯이 가버렸다.
얼마 전에는 받으면 안 되는 전화를 받았다. 내 나이 정도 되면 절대 받기 싫은, 낯선 전화 말이다. 그러면 보통은 비보다. 좋은 소식을 모르는 새가 물어 올리 없다. 한 10년 함께 매일 술 마시며 나를 챙겨줬던 형님이다.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주사도 많은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술 마시고 내 뒤통수를 진짜 세게 친 적이 있지만, 평생 그렇게 동생으로 사랑받아 본 적 없기에 그의 실수를 나는 이해했다. 그 날 내가 형이 보기에 많이 행복했나 보다. 그래, 그럼 뒤에서 나를 찌를 수도 있지.
정말 많이 울었다. 나이를 먹고 눈물이 많아지긴 했지만, 내 몸에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울었다. 그래도 형의 관은 내가 들어야겠어서 들었다. 제일 앞에서 들어줘야지. 그래야 형이 좋아할 것 같아. 마지막 본 게 언제였나. 한동안 매일 보던 사이였는데, 점점 뜸해지다 한 일 년 만에 돈이 필요해서 들렀다. 형이 하는 가게에 들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 돈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야 하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혹시 모를 위기가 오면 부탁해야지, 준비 하는 마음으로 갔다. 그러나 형은 일로 바빴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에 뭘 느꼈는지 형이 전화를 해서는 술 한잔 하자고 했지만, 내겐 또 바쁜 내일이 있어 다음에 만나자고 미뤘다. 그렇게 나를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그리곤 갑자기 죽었다.
사랑 노래가 이성 간의 사랑만 노래하는 줄 알았는데, 이젠 그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나를 흥분케 하는 이성의 짜릿하고 씁쓸한 사랑은 마음에 걸치지만, 묵직하게 오고 가는 우정은 온몸과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떠난 이성은 다른 이성으로 채워지지만, 멀리 가버린 형이나 동생은 그 무엇으로도 못 채우겠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내게는 그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 현재 곁에 있기때문이다.
허투루 보낸 시간이 아까와졌다. 나는 왜 게임을 하는가? 그래서 경쟁처럼 하던 최신 게임에서 조금 떨어져 봤다. 더 많은 폴리곤, 더 많은 특수효과, 더 많은 프레임, 더 높은 해상도, 과연 이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었나. 그러다 국민학교 때 풀지 못한 오락실 게임이 생각나서 레트로 게임 카페에 가입했다. 난 그게 낡은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라웠다. 최근의 몰개성한 게임보다 더 재치 있고 몰입도가 높았다. 그 게임들은 내게 끝없이 단련을 요구했고, 허튼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물론 엄청 후진 게임도 있지만, 내가 좋아했던 게임들은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진검승부를 요구했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지금 보다 더 건강하고 열정이 넘치던 내가 있던 시절로, 그리고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한다. 그곳에는 내 여자를 훔쳐간 마귀나 악랄한 현상 수배범, 나를 암살하려 달려드는 무수한 닌자들, 평화를 앗아간 드래곤, 끝없이 사격하는 적기들이 넘쳐난다. 어떤 날에 나는 형편없다. 그래서 분한 마음에 성급하게 일어서기도 하지만, 결국 최후의 한 방을 선사하는 건 언제나 단 한 기면 충분했다.
사제 기억하는가? 너와 운동하며 어찌 이리 우리 운동을 완벽하게 재연했냐며 감탄했던 그 버추어 파이터 2를 나는 이제 집에서 한다. 형님 기억하십니까. 마지막으로 술잔을 들었던 날, 형님 모시고 서울 삼성병원에 다녀와서 제가 요즘 오락실 기판 산다고 했을 때 형님은 껄껄 웃으면서 너 참 창의적으로 논다며 부러워 하셨죠. 마계촌 이야기하니 음악 멋있는 게임이었다고 기억하시고, 알타입 이야기하니까 그래픽 엄청 좋은 게임 아니냐며 절 놀라게 했어요. 맞습니다. 그 게임들 전 지금 집에서 기판으로 합니다. 에뮬로 해도 되고 fpga로 해도 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소. 형 목소리 똑같이 재현한다고, 형은 아니잖아.
그래 인생은 긴 게임이다. 오늘 아끼는 전우들을 몇 기 잃었지만, 멈춰 설 순 없다. 가야지 앞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페이즈가 나를 기다릴까. 무엇에게든 맥없이 지지 말자. 그냥 태어나고 , 만났을리 없는 내 동료들 몫까지 모두 준비해서 마지막 샷은 후회 없이 날리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