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 기판

배틀 서킷, On your marks

매드 포엣 2022. 10. 8. 18:17

케이스에 특별한 손상은 없고 스티커도 원본이다.
피닉스 패치로 롬을 몇 개 구운 것이 보이지만 스티커와 롬 모두 상태가 좋다.
이 당시 캡콤의 색감과 디자인은 최고다.



기판을 처음으로 구매할 때 이야기다. 나는 첫 기판으로 극상파로디우스를 사고 두 개의 기판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둘 다 cps2 기판이었는데, 하나가 에일리언대프레데터 나머지가 배틀 서킷이었다.

에일리언대프레데터는 대학시절에 즐겼던 게임이고 당시 벨트스크롤의 정점에 있는 게임이었지만, 나는 해본 게임보다는 못해봤던 게임을 더 원했기 때문에 어쩐지 배틀 서킷으로 자꾸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나 결국 미인 린 쿠로사와가 있는 에일리언대프레데터를 먼저 구매했다. 당시 그다지 기판을 구매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중에 구매해도 되겠다 싶었지. 그렇게 놓치곤 3년이 흘러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판이었다. 드물거나 비싼 기판은 아니었는데, 나오는 매물마다 조금 늦어서 놓치다 보니 어느새 cps2 기판도 끝물이 돼서 이젠 대림상가에서도 구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며칠 전에 내가 기판 시작하고 두 번째로 만났던 판매자가 배틀 서킷을 매물로 내놨다. 가격은 싼 것도 비싼 것도 아닌 정도였지만, 올해 안식년을 갖고 싶던 나는 고민했다. 과연 내가 이걸 원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샀는데, ㅋㅋ 나는 캡콤을 너무!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기판을 시작했는가? 나는 어떤 게임을 좋아하는가? 정말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꽤 오래 돌아온 기분이다.

뭔가를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가끔은 눈을 가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가. 다른 이들이 말하는 레어나 명작 타이틀을 내가 제일 먼저 오락실에 들어가서 즐겼었나. 지금 게임은 내게 중요한 의미, 삶의 활력을 유지하는 에너지와 휴식을 동시에 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피로감이 느껴지는게, 게임을 즐기는 것과 상관없는 소유욕, 아는 만큼 커진 욕망 때문에 피곤함 역시 늘었다.

하여튼 구매한 기판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히트한 게임이 아닌 배틀 서킷은 거의 컨버전이 없어서 당연히 오리지널이었고, 케이스, 기판 상태도 양호했다. 일본에서 구매하는 게 아니면 국내에서 돌던 cps2의 상태는 보통 엉망이라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이 정도면 선방이다.

게임은 역시 훌륭하다. 캡콤 벨트스크롤의 끝판. 그래픽은 미려하고, 조작감은 뛰어나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기술로 공부할 거리가 넘쳐난다. 이런 위대한 게임이 안 팔리다니.

그 시절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많은 천재들이 많은 작품으로 많은 추억을 선사했지만, 새로운 천재들은 또 더 새로운 작품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내가 가던 오락실의 풍경도 이즈음부터 많이 변했다. 그리고 또 큰 시대의 변화에 휩쓸려 간신히 남았던 오락실들 조차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 시간을 정통으로 맞았던 나는 가끔 애수를 느낀다. 매일 만나던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 잊고 산 기분이랄까. 그런 기분은 가을에 더 찾아오는 것 같고, 을씨년스럽게 비 오는 날, 혼자 어둑한 방에 앉아서 20년 이상 지난 기판을 만질 때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기분이 쓴 커피처럼 싫지 않은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