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 기판

다크 스토커즈, 청춘의 환상

매드 포엣 2023. 8. 5. 08:31

고3 시절에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발매하는 바람에 스파 2에 빠질 기회를 놓친 나는 이후 버추어 파이터를 필두로 세가의 3d게임에 한참 빠져지냈지만, 어느 날 그림 동아리 후배가 가져온 게이머즈(혹은 게임라인) 잡지에 스파  최신작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2 터보가 발매된다는 소식을 접하며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스파를 하진 않아도 오래전부터 캡콤의 팬이었고, 당시 스파의 아트웍은 국내는 물론 해외 그림 쟁이들에게 베스트 픽이었던 만큼 그림 동아리 사람들도 좋아했었다. 슈퍼스파2터보는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의 후속작으로 최초로 슈퍼 콤보(초필살기)를 도입했고, 모든 캐릭터에 신 기술이 생겨서 새로 그린 애니메이션을 넣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이소룡의 오마쥬인 페이롱이 주력이었다.)

우와 이거 죽인다고 낄낄거리며 동아리 녀석들과 놀고있는데, 가장 친하게 지내던 후배 녀석이 늦게 들어오며 “어라 이거 우리 동네에 나왔는데요." 이러는 거다. 평소에 실없는 소리 일절 안하는 녀석이라 아니 이게 어떻게 너네 동네에 있냐고 물어보며, 나는 경험에서 우러난 촉으로 혹시 너네 오락실 아저씨가 새로운 게임 자주 가져다 놓는 분이냐고 물었다.

녀석 말로는 지하에 있는 오락실인데 주인이 신 게임을 굉장히 빨리 갖다 놓고, 또 빨리 빠진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아! 기판 가져다 주는 사람이다...바로 그날 오후에 후배 녀석과 그 오락실에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실제 당시 오락실에서 받았던 30년 정도 된 광고지.


그리고 간 곳에는 정말로!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터보가 있었다! 예상대로 주인 아저씨는 춘천 오락실에 기판을 공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판이 나가기 전에 자신의 가게에 설치해 두고 인컴 테스트를 하는 중이었던 것. 대학생 시절이라 용돈의 부족함이 없던 나는 스파 대인전에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두드려 맞았다. 열화권 3회와 치염각, 승룡권 커맨드는 너무 어려웠지.

오락실에 돈을 때려 부어서인지 주인 아저씨는 우리를 제대로 인식했고, 이후로는 새로운 게임이 나온다며 언질을 주고, 인서트나 브로마이드를 챙겨줬다. (물론 내가 그런 게 오면 버리지 말고 달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나온 게임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크 스토커즈
 

그 시절 명동에 가서 샀던 다크스토커즈 (일본명 뱀파이어) 게메스트 공략집.

마치 데즈카 오사무와 디즈니의 그림이 합쳐진 듯한 충격적인 디자인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디즈니의 기술에 일본 만화의 뾰족한 센스가 더해지면 얼마나 멋질까 했는데, 그걸 캡콤이 해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내가 캡콤의 요염함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지점이 이때 극대화 됐는데, 그야말로 섹시미가 극에 달한 아트스타일에 홀딱 반했다.
 
그때부터 이 게임을 잘하고 싶었던 것은 물론이요. 이 스타일의 그림을 한참 따라 그렸었다. 하지만 그게 쉬우면 누군들 아티스트가 되지 못하겠는가. 심지어 나는 2d 게임에 늦게 입문한 편이어서 게임도 더럽게 못했다. 역가드를 알게 된 것도 이후 몇 년이 지나서니 알만하다. 
 
하여튼 지금처럼 정보가 넘치는 시대가 아니었던 만큼 몸으로 눈으로 때워서 오락을 하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돈을 가져다 부었는지 슈스파 2 터보는 나중에 어지간히 하긴 했다. 그러나 다크 스토커즈는 놀라운 게임이었는데도, 스파와 다른 시스템, 디자인에 대중들이 적응하지 못해 이내 곧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다크 스토커즈라는 게임에 환상을 품고 살았다. 
 
그건 단순히 섹시한 그림이 아니라, 대학시절 예쁘고 똑똑해서 다가가지 못하던 성숙한 여선배이거나, 미쳐 내가 흉내 내지 못하는 대가의 그림 속, 빼어난 한줄기 선 같은 것이었다. 
 
이후 나의 삶과 오락실은 대 변혁을 맞으면서 캡콤의 2D 게임들, 특히 2D 격투 게임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급하게 사라질 때 나도 오락실에서 반 발 정도 뺀다. 뒤 이어 시대를 호령했던 세가의 3D 아케이드 게임들 마저 사라지고, 꿈을 키우고, 삼키던 오락실이 없어지며 나 역시 따분한 어른이 됐다.
 
이제 내 속에 앳된 청년은 없다. 동경하던 선배는 색이 바래지고, 꿈이었던 한 줄의 선에 다가가긴커녕 도망쳐 더 멀어진 지금, 문득 그 시절 환상을 꺼내본다.  
 

국내 정식 발매 캐릭터 포스터, 내 소중한 보물이다. 후배와 캐릭별로 나눴는데, 모리건을 갖기 위해 많이 희생했다. BENGUS의 미친 화력.

과연 너는 여전히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