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앤 고블린스, 유령이 내리는 날
그날은 밤부터 폭설이 내렸다.
몇 달 전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 아내와 말을 하지 않았다. 내게 세상과의 마지막 통로였던 아내와의 대화를 끊자, 나의 생활은 완전한 적막이 되었다. 쉼 없이 눈만 내려 모든 것이 멈춘 고요한 세상처럼 말이다.
공교롭게도 다음 날 아내와 나는 새벽에 출근했고, 눈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어 아내는 평소보다 한 시간 먼저 나갔다. 아마도 걷거나, 택시를 탈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걸어갈 생각으로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나갔다. 과연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엄청난 눈이었다. 출근만 아니었다면, 그 장관을 즐길 수 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한참 누군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걷는데, 어디선가 실루엣이 유령처럼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내였다. 척 봐도 난감한 일을 겪은 얼굴이다. 다퉈서 침묵 중인데, 이런 폭설 속에서, 외나무다리 같은 길에서 당황한 아내를 만난 것이다. 당연히 구차한 감정은 사라졌고, 나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핸드폰을 떨어뜨린 것 같아. 오빠는 빨리 출근해."
아내는 검소한 사람이라, 늘 비싸거나 좋은 물건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오래 쓰던 폰이 말썽이라 바꿨는데, 내가 이번엔 좀 좋은 폰을 쓰라고 권했었다. 그 최신 폰을 잃어버린 것이다.
출근이고 뭐고 둘은 휘날리는 눈발속에서 열심히 무릎까지 쌓인 눈을 뒤지며 찾았다. 사실 그 폰을 찾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아내를 통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 기뻤다.
결국 폰을 찾지 못하고 우리는 한 시간 반 늦게 웃으며 출근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이 그쳤을 때는 열심히 치운 눈이 길가에 내 목까지 쌓였다. 일주일 정도 한파가 지속됐고, 출퇴근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얼어버린 눈 속에서 벨소리가 들릴까, 계속해서 아내의 전화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던 전화는 어느 순간 배터리가 다 됐는지 완전히 꺼졌다. 아내는 속상해했지만, 우리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그런대로 다시 행복해졌다.
아내의 약정은 일 년이 넘게 남았기에, 나는 몇 번이나 다른 폰을 권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전에 쓰던 낡은 폰을 꺼내고는 됐다고만 말했다. 그 폰은 배터리 문제뿐 아니라 전화를 걸고 받는 기본적인 부분에도 문제가 많은 폰이라서 짜증 나는 일이 많았는데도, "아니 나 이 폰 쓸 거야."라고만 말했다.
그러다 10개월이 지나고 모르는 번호로 내게 전화가 왔다.
"저기요. 어떤 폰에 이 번호가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예? 내 번호가 어디 있는데요?"
"주운 전화기에 전원을 넣었더니 이 번호가 엄청 많이 전화했더라고요."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세상에나!
"그거 잃어버린 제 와이프 전화기입니다. 거기 어디예요?
그렇게 어느 중학생들에게 사례금을 주고 아내의 전화기를 받아왔다. 그리고 아내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말없이 전화기를 꺼내 놓았다.
"아. 이거 뭐야. 내가 전화기 사지 말랬잖아."
"자세히 봐봐."
"응? 어...어...이거 뭐야. 왜 여기 내가 쓰는 게 다 깔려있어?"
"그거 당신이 겨울에 잃어버린 폰이야."
"꺄!!!!!!!!!!!!!!!"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기다림이란 뭘까. 나처럼 성미 급한 사람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다른 폰을 샀을 테고, 잃어버린 폰이 돌아와서 기쁘긴 했겠지만, 아내와 달리 낭패를 봤겠지. 그러나 아내는 기다렸다. 정말 미련할 정도로, 뭐에 씐 사람처럼 계속 그냥 버텼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말처럼 보답하듯 폰이 돌아온 것이다.
기판을 하면서 가장 사고 싶던 게임은 오로지 캡콤의 게임이었다. 내게는 캡콤 사랑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시골인 이곳에서 몇 안 되는 오락실 친구들 중에 캡콤 게임을 알아보고, 이 정도로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캡콤은 지금 위대한 게임 회사가 되었다.
그래도 고전 게임보다는 CPS2류의 그나마 최신 기판을 사고 싶었다. 아름다운 발색이며 그래픽 디자인, 세련된 사운드, 손에 착 붙는 조작감. 그러나 길어지는 수집 생활에서 결국에는 과거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내게는 너무 소중하고 아픈 추억의 건스모크와 마계촌에 도착했다.
다른 기판들은 있으니까, 파니까 샀다면, 건스모크와 마계촌은 일부러 찾아서 샀다. 당시 이베이를 처음 이용할 때라 잘 몰라 망설였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게임에 지불할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이 있었다. 그게 그때는 15만 원, 1만 5천엔, 150달러였다. 게임에 그 이상의 돈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고장 난 정품 건스모크를 싼 가격에 구했고, 마계촌은 프랑스에서 복사를 120달러 정도에 구매했었다. 내게 건스모크는 아버지, 마계촌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추억이 있다. 특히 마계촌은 어머니가 어릴 적에 시장 오락실에 데려가서 처음 본 게임이기 때문에, 그 순간의 문화 충격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망가지고는 모든 것이 싫었지만, 기판을 구매하면서 마계촌을 마주하는 건 당연한 운명이었달까.
마지노선이 끊어지기 전까지 내게 오리지널 마계촌은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다 그 선을 넘어설 쯔음에는 마계촌의 가격은 꽤나 높아져있었고, 무엇보다 불편한 어머니를 떠올리는 마계촌...복사가 이렇게 완벽한데...지갑도 마음도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까짓 거.
알고 보니 마계촌은 싼 적이 별로 없었다. 10년 전에도 비쌌다. 오히려 얼마 전에 판매러시 속에 잠깐 싸진 거였다. 지금은 물론 다시 비싸졌다. 나이 먹고 게임을 수집하면서 정품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그걸 만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 그걸 진지하게 즐기는 사람에 대한 존중.
수년간 기판을 수집하면서 몇 번의 마계촌을 봤지만,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마치 어머니와 둘이 방에 앉아 있으면 느껴지는 긴장감, 사소한 것에도 트집을 잡고야 마는 까칠함처럼 나는 옹졸했다.
같은 카페의 회원과 비딩을 넣고 졌던 것을 마지막으로, 아 이제 나는 괜찮은 오리지널 마계촌은 못 사겠다고 생각했다. 만듦새가 아주 훌륭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별한 마계촌 복사 기판을 가졌으면 됐지.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잠이 안 와서 뒤척거리며 폰을 보다 우연히 꽤나 멀쩡한 건스모크 기판을 봤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기판 상태가 좋지 못해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거면 좀 괜찮겠다. 살까 말까 고민을 하다 결국에는 구매를 했다. 가격은 더 괜찮았다. 그리고 그 기판의 진행 상황을 체크하다 마계촌이 떴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쌍으로 눈에 띄었을까.
가격은 싸지 않았지만, 사진이 내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 설명을 보면서 솔직히 조금 떨었다.

기판 구매는 사실상 이제 멈추려는 참이었다. 얼마 전에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기판을 국내에서 비싸게 샀고, 더이상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글에 흔들리지 않을만큼 단단해졌다.
하지만 이건 참을 수 없었다. 나의 근원을 찾고 끝까지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 게 여기서 나온다고? 그 순간 아내의 기다림이 생각났다. 그건 나 같은 촐랑이는 상상도 못 할 정말 신기하고 대단한 일이었는데...내게도?
생각 못한 지출이었지만, 술 한잔 덜하면 된다. 책 읽는 시간을 더 늘리면 된다. 쾌적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 무엇도 나빠질 건 없었다.
새것처럼 아름다운 마계촌 기판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닌가? 폭설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던 그날의 아내를 생각한다. 일을 제외하곤 누구 하고도 대화하지 않던 시간이 꽤 길었다. 그 공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하얀 아내는 사랑스러웠다. 다시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세상에는 많은 의미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알았다. 아내에게 기다림은 그다지 복잡한 일이 아닌 것 같다. 물어보면 늘 "그냥"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나는 귀신, 유령을 믿지 않는다. 그건 모두 나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가장 무식하고 저렴한 핑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 낭만적일 필요가 있을까. 처음 기판을 시작할 때 건물을 폐기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우스갯소리로 혹시 오락기통을 본 적 있냐 물었더니 마침 치울 게 있다더라. 강력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를 따라갔다. 그곳은 아주 오래전에 영업을 그만둔 모텔, 혹은 호텔이었다. 으스스한 흉가라서 문을 빠루로 따고, 앞에 쌓여있는 알 수 없는 쓰레기들을 망치로 부수고, 치우며 단 둘이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그 기통 안에 마계촌이 있기를 바랐다. 기판을 막 시작한 그때 다른 게 아닌 바로 마계촌을 원했던 것이다. 그게 그 안에서 나온다면 너무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에는 포트리스가 있었다. 실망했지만, 힘을 써준 그 사람에게 소정의 수고료와 음료를 사줬다. 괴상한 경험이지만 즐거웠다.
국내에서 마계촌 정품 기판을 파는 사람의 글을 발견했다. 1년 정도 지난 글이었다. 그래도 연락해 봤더니 이틀 전에 누군가 사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건스모크 기판을 하나 더 들였는데, 그 때문에 완벽한 마계촌 기판을 만날 줄은 몰랐다. 아직 풀지 못한 어머니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리의 관계가 다시 아름다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유령을 믿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그런 세상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의미 없는 일이나 의미 없는 만남은 없다는 센티멘탈한 세상, 그 속에서는 어떤 유령이 활보해도 괜찮다.
유령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유령을 그리움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 유령을 운명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 유령을 매혹이라고 불러도 괜찮다. 혹은 상처, 화해 무엇이든 괜찮다.
그렇다면 나는 믿지 않겠지만, 검은 밤의 장막을 찢고 내리는 하얀 눈의 적막 속에서 아내와 서로를 발견하고 안도했던 것처럼, 그 유령이 언젠가 나를 찾아서 곁에 머물러주기를,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또 벌어지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