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살 게이머, 침묵의 바다에서

성인이 되고 얼마만에 생일 케익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올 여름 휴가를 맞춰 처가와 물놀이를 갔는데, 저녁에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가족들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줬다. 케익의 디자인은 처제와 동서였다. 아주 만족한다.
나는 덕후로 태어난 사람이다. 뭔가 편집증 같은 것이 어릴 적부터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그걸 느낀 것은 물건을 사면 사소한 택이나 포장, 광고 전단까지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다. 그런 커뮤니티에 가면 배워서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그냥 날 때부터 그게 그냥 좋아서 잘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인생, 뭔가를 너무 좋아하다 그것을 잃었을 때의 큰 아픔을 겪고는 일부러 어떤 것에도 깊게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중독적인 음식이나 담배 같은 것을 멀리 하는 것 같다. 즐길 때의 기쁨보다 잃었을 때의 아픔을 더 크게 느낀다고 해야 하나.
지금의 나는 어중간한 인간이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그 열정의 절반정도에 도달하면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뒤로 가려는 습성이 생긴 것이다.
그런 내가 정말 온 열정을 다한 게 바로 지금 아내와의 사랑이다. 처음엔 이런저런 걸림돌도 많았지만, 너무 좋아서, 사랑해야만 한다면 끝까지 가자는 마음으로,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다가갔다. 그녀에게 나를 다 보여주는 게, 보통의 한국 여성처럼 게이머를, 덕후를 마뜩지 않게 생각하던 그녀의 마음을 돌려야한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쉬웠다.
이미 한 걸음 빼놓고 적당히 살던 나에게 끝까지 달려 다 태울 수 있는 기쁨을 알게 해 준 덕분에 어떤 일도 우리를 위해서라면 멈출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든 그녀가 부르면 게임기의 전원을 끄고, 보던 영화의 스크린을 올리고, 읽던 책을 덮고, 음악의 볼륨을 낮췄다.
그런 관계에 대한 존중이 바로 내 취미에 대한 그녀의 배려로 이어졌다.
아내는 내게 많은 콘솔 게임기를 선물로 사줬고, 아케이드 기통을 선물했고, 기판 사는 것을 이해해 줬다. 그녀는 이제 게이머를 사랑한다. 아주 좋은 취미라고 말한다.
얼마 전 일에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아무하고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4개월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내게 마음의 병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침묵의 바다에서 본 것을 믿는다. 하얀 고독, 은은한 빛이 파도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충분히 많다. 나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나도 너를 그렇게 감싸고 있기를 바란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덕후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