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 게이머, 말숙이님을 만나다

2026. 4. 19. 19:52생각

고등학생때 부터 서점과 극장이 많은 강릉을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때즘에 속초에 모든 서점 주인과 친해질 정도로 물리게 다녔고,극장이라곤 꼴랑 두 개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서점에 가 처음 보는 책을 만나고, 속초에 들어오지 않는 신작이나 아트 영화를 보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용돈을 모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일요일 오전 일찍 강릉에 갔다가 저녁 늦게 속초로 돌아오곤 했다.

그 시절에 샀던 해적판 중에 기억나는 것이 일반 판형의 아키라, 북두신권, 터치와 500원 짜리 작은 판형의 가이버, 드래곤볼, 타루루토군등이었다. 이후에 서울의 유명 수입 서점을 다니면서 원판을 사기 전까지는 강릉에 가는 것이 고딩시절의 나름 즐거운 일탈이었다. 영화라면 찰리쉰과 웨슬리 스나입스가 나왔던 메이저 리그가 기억난다. 그 때 극장은 놀랍게도 롯데리아(너무 오래 돼서 아닐 수도 있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첫사랑 같은 열기가 있었다. 잘 몰랐고, 마냥 불타올랐고, 그냥 가기만 해도 좋았다. 덜컹거리는 버스와 선선한 바람, 워크맨, 바다곁으로 이어진 길…

글을 쓰다보니 나이가 들고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친해진 후배가 강릉 사람이어서 녀석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만화방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던 만화가 인기가 없어 다니던 만화방에서 뒤에 권을 받지 않고 끊었는데, 녀석 살던 동네에 그 만화들이 다 들어오고 완결 났다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그 만화가 “명가의 술”, “루키즈”였다. ㅋㅋ 만화방에서 눈물, 콧물 흘리고...

네이버 “오락실게임 애호가들” 카페의 주인장인 콜플님에게 내가 사는 동네에는 같은 취미를 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투정을 했는데, 근처 강릉에 말숙이라는 닉을 쓰는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딱히 카페에서 교류한 적은 없지만, 구매글이나 방사진을 통해 나름 헤비 콜렉터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강릉이라, 생각만 해도 설레는 곳이고, 말숙이라는 사람이 궁금하긴 한데, 무턱대고 연락한다는 게 나이 먹을수록 어쩐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알고만 지내다가, 몇 주 전에 올라온 말숙이님의 포스팅에는 평소 안하던 기판 수리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지방이라 기판 수리가 용이하지 않은데, 마침 친한 친구가 기판 수리를 할 줄 알아 기쁘다는 얘기였다. 수리한 내역에는 나도 가지고 있는 기판이 있어서, 이참에 정보 교환차 한 번 말을 걸었는데, 고맙게도 다정한 답장이 왔다.

그리고 몇 번의 대화를 하고 강릉에서 보기로 했다. 심지어 내 고장난 기판도 봐주기로 했다. 고치면 좋지만, 아무래도 좋은 기판인데, 신경써줘서 고마웠다.

뭐가 어찌됐든 강릉에 가는 길은 역시 신났다. 처음 대면은 말숙이님의 사무실이었다. 아주 개인적인 사항은 여기에 적지 않겠다. 내 감상으로 말숙이님은 개방적인 캐릭터고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소통을 마다하지 않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직접 연락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작은 사무실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제일 궁금한 것은 어떻게 오락실 기판과 기통에 관한 취미를 가졌을까였다. 기판 취미를 가진 사람 중에는 비교적 어린 사람이라 더 궁금했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랬듯 오락실에 대한 나름 절절한 추억이 있었다.

다음에는 가지고 있는 기통과 기판의 양이 많았던 만큼 모으는 과정과 고충이 궁금했다. 거기에는 조금 생각지 못한 순간이 있었지만, 듣고 보니 아주 건강하고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취미를 말숙이님 보다 조금 먼저 시작하면서 늦게 입문한 사람들의 수집과정을 간접적으로 카페나 포스팅을 통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다수는 순간의 뽐뿌로 시작했다가 열정이 식고 바로 손해보면서 처분하고 떠나는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에 지금까지 꾸준하게 양질의(그리고 고가의) 콜렉팅을 하는 말숙이님의 현재 사정과 목표가 궁금했고, 그에 대한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기통과 기판 게임에 관해서 두서없이 다양하게 늘어놨는데, 비슷한 시선이나 리뷰가 이어질때는 나름 오호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본인의 게임에 대한 경험과 가치관에 대한 기백, 자부심이 느껴졌고, 무엇보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도 많았던 만큼 냉정한 솔루션과 시선은 인상적이었다.

내 눈에 말숙이님은 플레이형 게이머였다. 사실 기판을 수집하건 투자하건 삶아먹건 구워먹건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없다. 그건 본인들의 취향이고 선택이니 뭐라 하겠는가? 그래도 내 취향을 따지자면 나는 플레이를 목표로 하는 게이머를 더 좋아한다. 그건 뭐가 옳거나 글러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숙이님은 무조건 하루에 한 두 시간은 기통으로 게임을 즐기고, 가끔씩 친구들을 불러서 오락실처럼 다같이 논다고 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오락실 게임의 완성은 교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러가지를 의미하지만, 일단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플레이하면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그래서 산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 산에 오를 것을 권하는 것처럼, 게임을 좋아한다면 일단 플레이를 권한다. 도전하고 완주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과잉 속에 등산이 얼마나 좋은지는 다들 머리로 알고 있지만, 자신의 두 다리로 숨을 끝까지 몰아 붙이며 걸어야만 알 수 있는 정상 등극의 기쁨, 그리고 찾아오는 산에 대한 경외감은 해 보지 않고 짐작만으론 얻을 수 없다. 그러니 기판과 기통을 통해 재건한 오락실에서의 진정한 교류를 위해선 게임을 함께 플레이 하며 소통하고 공감해야한다.
 
게이머로서 업무 이후에 시간을 내서 즐기는 한 두 시간의 게임 플레이는 존중받을만하다. 더불어 수준 높은 콜렉션들을 지인들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즐길 수 있게 나눠주는 것 역시 놀랍다. 아마도 그가 받은 대가는 교류의 즐거움, 특별한 인생을 사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런 오락실의 즐거움은 역시 해 본 사람만이 아는 법, 놀줄아는 오락실 플레이어라고 느꼈다.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두 대의 뉴넷.

시간이 없던 관계로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기통을 보러 자리를 이동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정식으로 게임을 즐기는 공간은 아니었지만 6대 정도의 기통이 있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뉴넷이었다. 기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말숙이님의 뉴넷에 대한 찬사가 있었다. 많은 기통을 사용하진 못했지만, 뉴넷의 강점을 늘 생각하고 있던터라 크게 공감했다. 
 
이 두 대의 뉴넷에는 아카이 카타나와 건버드가 설치되어있었는데, jvs to jamma를 왼쪽에는 코나미, 오른쪽에는 남코 것이 설치 되어있었다. 말숙이님의 포스팅처럼 색감에서 완연한 차이가 났는데, 색감이 빠져보인다는 코나미 어댑터 쪽은 실제 플레이 경험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해보였다. 

SNK의 상징과도 같은 기통 NEO SC-19.

그리고 국내의 유명 유저가 리스토어한 네오 19가 있었다. 상태가 너무 훌륭해서 눈 호강이란 이럴때 쓰는 말이구나 생각했다. 아케이드 역사의 귀중한 조각 하나가 대한민국의 지방 창고에서 숨쉬고있다는 게 감격적이었는데, 바로 옆에 더 대단한 놈이 있었다.

캡콤이 cps2와 함께 판매했던 Q-grandam, 일본 현지에서도 상태 좋은 녀석은 상당히 귀한 것으로 안다.

일본의 캡콤 직영에 풀었던 탓에 지금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Q-grandam이 바로 옆에 있었다. 내가 올드 캡콤의 팬이어서 더 눈길이 갔는데, 일본 가정에서 개인이 쓰던 녀석을 공수해와서 얼핏보면 세월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브라운관의 상태가 너무 좋아 고해상도관을 사용한듯 선예도에 말이 안나왔다.
 
그리고 옆에는 역시 상태 좋은 남코의 사이버리드 기통이 있었다. 마퀴 부분에 도트 액정으로 구동하는 게임을 보여주는 기믹이 특이했다. 그 끝에는 캡콤의 큐트가 스트리트 파이터 3 서드 스트라이커와 함께 구동중이었다.

왼쪽이 코나미, 오른쪽이 남코 어댑터를 사용한 것. 색감의 차이가 아니라 코나미 것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곳이 말숙이님의 본진 오락실이다.

그리고 올라간 곳이 진짜 말숙이님의 본진이었다. 에어로시티, NEO29, MVS-U4, 이글렛2, 아스트로시티, 블라스트시티등 화려한 기통들이 있다. 

일본에 사는 매니아의 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귀한 일제 기통이 많았다.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 감옥...아니 도돈파치 대왕생의 입간판.
역시 가정에서 구동했다는 SNK U4 캐비넷, 외관은 물론 이놈도 브라운관의 상태가 좋아서 날카로움에 눈이 베일 정도였다.
매일 한 시간씩 플레이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이 닿는 1p쪽 패널의 인쇄가 많이 지워졌다.

위 사진의 왼쪽 귀퉁이에는 아카다님이 만든 노이즈 필터 달린 전원 케이블이 있다. 말숙이님의 말에 의하면 상당한 효과를 봤다고 한다.

하이퍼 네오지오64라고 적혀있는 패널, 기통은 NEO29일까.

짧은 시간 이것 저것 욕심을 부린 탓에 제대로 사진에 다 담지 못한 게 아쉽다. 솔직히 진즉부터 나는 기통에 관심이 없었고, 기판 구매도 최근 완전히 끊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말숙이라는 게이머와의 게임 이야기, 혹은 거쳐온 게임 인생에 포커스를 맞췄다. 그래서 그가 모은 기통이나 기판을 감상하기보다 대화를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역시 나눠서 생각할 수 없는 것, 자연스럽게 아케이드 역사의 전리품으로 대화가 흘러갔고,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는 자신의 애장품 공개를 기꺼이 해줬다.

나와 말숙이님 인생에는 제법 긴 시간차가 존재하기에, 서로의 이야기에 다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우리가 자신만의 추억을 찾아 길을 떠났으니 시작만큼 끝도 다르리라. 나는 대학시절 친구를 만나러 강릉에 갔다가 신영 극장 근처의 버파3가 있던 오락실을 기억한다. 그곳에는 아스트로시티같은 일제 기통이 가득있었고, 에스프레이드에는 세이미츠 레버가 달려있었다.

어쩌면 그 공간을 우리가 시간차를 두고 다녀 갔는지 모를 일이다. 오락만 하러 강릉에 간 적은 없지만, 이렇게 나의 추억 구석 구석에는 스쳤던 오락실의 노스텔지어가 양념 처럼 들어가 오락실 키드들과는 무엇으로든 연결됐다는 동지애를 느낀다.

단 몇시간 보고 말숙이님이 어떤 게이머인지 단정지을 수 없지만, 대단한 수집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매일 오락실 게임과 씨름하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것도 확실하다.

산길을 걷다 보면 평범한 풀이나 별 것 아닌 풍경에도 감탄하는 경우가 많다.
 
내 발로 직접 걸어서 겪는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그 들에선 흔한 바람도 감동으로 불어온다. 하물며 절경이라...말숙이님이 가는 길에도 바람이 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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