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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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 구호본격성인만화, 오리온
늘 가던 만화방에 새로운 만화들이 들어와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다이나믹 콩콩코믹스 자리였는데, 특이한 판형의 책이 몇 권 있었다. 그러면 안됐지만, 단골이었고 이미 매니아였기에 영세한 만화방 주인은 내게 성인만화를 허락했다. 그래서 처음 본 대남은 와! 내 인생의 모든 가치관을 다 바꿔버렸다. 사랑과 섹스, 투쟁과 폭력, 삶과 죽음 그리고 수많은 사랑스러운 궤변들… 권법소년이나 보던 어린애가 어른의 세계를 알아 버린 것이다. 이후로 정말 많은 일본의 청년 만화들이 성인만화로 번역되어 들어왔다. 사실 지금 보면 검열과 모자이크로 원본을 너무 해쳐서 성인만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작품이 담고 있는 철학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내가 좋아했던 만화들의 공통점에는 그림보다는 스토리를 ..
2025.06.21 -
위험한 가정교사, 이케나이 루나선생
표현의 자유에 굉장히 너그러운 일본 만화계에도 몇 번의 큰 사건이 있었는데, 단연 첫 번째는 나가이고의 파렴치 학원 사건 일 것이다. 소년점프에 연재하면서 우리 정서로는 거의 성인 만화 수준의 음담패설이 패기 넘치는 만화로, 당연히 일본 사회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압력을 받아 연재 종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사실 나가이고의 대다수 만화가 외설적이고 과격해서 어린이들에게 추천하기는 좀 그렇다. (물론 나는 국딩시절 엄청 재밌게 봄)그리고 수십 년 후에 이번에는 일본 청년지에 연재했던 만화들에 큰 철퇴가 내려지는데, 그 계기는 학원물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성적인 콘텐츠가 특히 문제가 됐다. 일본의 어머니회를 중심으로 불거진 이 사건으로 청년지에 연재했던 만화들도 수위에 따라 성인 딱지를 붙이며 판매와..
2025.04.29 -
우주 해적 코브라, 불사신과의 영원한 이별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로 나왔던 해적판, 이상석 버전을 모두 구매했었다. 뒤에 두껍게 나오기 전에 한 권씩 나온 버전이었다. 어린 시절 우주 해적 코브라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재밌고, 멋있는 캐릭터가 있을까 감탄에 감탄을 하며 광적으로 좋아했다. 수많은 수집품이 있었고, 살아가면서 잃어버려 마음이 쓰렸지만, 이 코브라 만화 모음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만큼 내 성장과정에 정말 많은 영향을 줬던 만화다.일본 만화면서 특이하게도 북미 코믹스 느낌이 강했다. 당시에는 이 만화의 그림체를 흉내 내는 박동파 같은 작가가 있는가 하면 코브라를 대놓고 따라 했던, 표절작으로 김형배작가의 작품도 있었다.어린아이가 보기에 대중적인 그림이나 내용이 아닐뿐더러, 일본 만화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유니크한 작품이..
2025.01.15 -
권법소년, 누가 추억을 힘이라 했나
어쩌다 보니 오래전에 좋아했던 만화책을 원판으로 구매했었다. 아마 15년 정도 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안정을 찾으며 그동안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다녔다.그중에 상위 티어에 위치한 작품이 바로 권법소년 한주먹 시리즈였다. 이 만화는 전성기 성룡의 홍콩 영화에 강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미국의 성장 드라마처럼 매편이 완성도가 높고, 그림에서 쿵후의 역동적인 장면들을 센스있게 잘 그린 걸작이다. 작가 오오시마 야스이치는 이것 외에도 청년 만화 “배터리(배트앤테리)”를 비슷한 시기에 대히트 시키고 수많은 만화를 그렸지만, 어쩐지 이후에는 다작을 해도 이만큼 대단한 작품을 내지는 못했다. 오오시마 야스이치의 딸 역시 만화가인데 오오시마 토와란 이름으로 여고생 바보군단이란 만..
2024.11.23 -
도라에몽, 나의 동짜몽!
국민학교 시절 가장 많이 다시 빌려 본 만화였다. 신기하게 지금의 소년 점프 단행본 사이즈에 일본식 우철 제본으로 나왔다. 하도 많이 봐서 지금도 눈에 선한, 전권 7권. 분명 도라에몽이 떠나면서 끝나는데, 정말 펑펑 울었다. 7권 밖에 안됐지만, 동짜몽의 세상은 어린 시절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이었다.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서 동짜몽(동글동글짜리짜리몽땅몽땅)의 원래 이름이 도라에몽이란 것과 일본에서 국민적 인기의 캐릭이란 것을 알았다. 분명 7권으로 끝난 동짜몽인데, 어떻게 이후에 그 많은 단행본이 나온 걸까?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지는 걸까?군대를 제대하고 바로 서울에 올라가서 들른 곳이 두군데,낙원상가에 기타를 사러 갔고, 동대문 만화 총판에 도라에몽을 사러 갔다. 낭만이었다. 총판에 들러..
2024.11.20 -
레이몬드 카버와 나무 책갈피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을 최근에 읽기 시작했다. 10년도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알게 된 작가였다. 그 시절에 발행한 단편집 세 권을 읽고 담백한 문체를 닮고 싶었지만, 그건 무리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문학동네에서 멋진 커버의 10주년 특별판을 발간한 것을 알곤 바로 구매했다. 이것 외에도 문학동네의 아름다운 특별판을 한 권 빼고 모두 샀다. 국내 출판물들의 디자인은 너무 조악해서 한숨이 나올 때가 많았는데, 문학동네에서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내용에 어울리는 높은 수준의 디자인을 원한다. 때 마침 친한 후배가 나무 공예에 빠졌는데, 책걸이와 책갈피를 선물로 만들어 보내줬다. 원하는 글귀가 있냐고 묻길래 게임 엘든링에서 미켈라가 남긴 말을 부탁했다. “나의 망설임을 이곳..
202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