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법소년, 누가 추억을 힘이라 했나

2024. 11. 23. 15:48책들

색이 바래긴 했지만, 안에는 거의 읽은 흔적이 없다.
어린 시절 친구이자 우상 한주먹.

이사가 잦아지면서 모두 잃어버리고 남은 것은 단 한권.
전설의 시작.
매력적이었던 한주먹의 엄마.

어쩌다 보니 모두 초판이었다. 대단한 건 아님.
당시 한국의 해적판은 그냥 복사한 것이 아니라 원작 위에 대고 그림을 따라 필사한 후에 발행한 것이 특이했다. 생각보다 잘 그렸다.

어쩌다 보니 오래전에 좋아했던 만화책을 원판으로 구매했었다. 아마 15년 정도 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안정을 찾으며 그동안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다녔다.

그중에 상위 티어에 위치한 작품이 바로 권법소년 한주먹 시리즈였다. 이 만화는 전성기 성룡의 홍콩 영화에 강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미국의 성장 드라마처럼 매편이 완성도가 높고, 그림에서 쿵후의 역동적인 장면들을 센스있게 잘 그린 걸작이다. 작가 오오시마 야스이치는 이것 외에도 청년 만화 “배터리(배트앤테리)”를 비슷한 시기에 대히트 시키고 수많은 만화를 그렸지만, 어쩐지 이후에는 다작을 해도 이만큼 대단한 작품을 내지는 못했다. 오오시마 야스이치의 딸 역시 만화가인데 오오시마 토와란 이름으로 여고생 바보군단이란 만화를 출간했다. 개그센스가 남다른 만화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슨 일인지 평범한 만화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만화를 너무 좋아하고 많이 봐서 여기서 보고 배운 대사를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쓸 때가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는 다이나믹 콩콩코믹스라는 브랜드로 불법 복제해서 발행, 작가의 이름은 그 유명한 “전성기”였다.

다이나믹 콩콩코믹스는 이것 외에도 일본의 만화를 많이 발행했고, 특히 기억나는 것은 콩콩 로보트, 우주해적 코브라, 쿤타맨, 프라레슬러 대장군등이 있었다. 처음에는 만화방에서 수십 번 빌려 읽었지만, 나중에 서점에서도 판매해서, 모두 구매해서 소장했었다.

그러나 집안에 불행한 일들이 생기고 잦은 이사를 하며 내 소장품 대다수를 분실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왔을 때 권법소년은 “누가 권법을 힘이라 했나”편 하나만 남게 된다. 아쉬운 맘이 없었다면 거짓이었겠지만, 그 시절 처음으로 삶의 무게를 느끼며 포기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철들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진 않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긴 했다.

그러다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서, 대단한 취미보다는 어릴 적에 좋아했던 것을 다시 구했다. 마치 와이프와 있는 평온한 시간이 어린 시절의 그 행복한 추억들과 등을 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와이프와 있으면 나도 모르게 과거의 내 방으로 가는 문을 열게 된다.

그 문을 열면 젊고 건강한 엄마, 언제나 나를 믿어주던 아빠 그리고 때 묻지 않은 동생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