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6. 13:09ㆍ오락실 기판

작년에 건스모크를 나만큼 좋아하는 유저를 우연히 알게 됐다. 얼핏 봐도 내 또래였는데, 건스모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에 아주 작은 도움을 줬다. 내게 건스모크를 사랑하는 게이머를 도울 기회가 왔다는 거, 굉장히 행복한 일이었다.
유저를 도우며 낡은 건스모크 기판을 테스트하는데 아무래도 기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아닐지 걱정이 생겼다. 그렇게 한동안 끊었던 기판 검색을 간간히 하다가 꽤 훌륭한 건스모크 기판을 어렵게 만났다. 비록 상태가 별로라도 이미 구동가능한 기판이 있으니, 다음에 구하는 것은 무조건 상태가 좋은 놈을 원했기 때문에 무척 기뻤다.
몇 년 전에 해외에서는 유행처럼 부모의 기판을 정리하는 물건들이 마구 쏟아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그런 사연과 물건을 못 만났는데(내가 그만큼 열심히 찾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 이번에 만난 건스모크 기판에는 그런 설명이 있었다.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는 간단한 설명이었다.
경매에 들어갈 때는 마음가짐이 대단히 중요하다. 꼭 낙찰받고 싶은 물건이라면 가격을 시세보다 높게 잡는 게 무조건 필요하다. 꼭 갖고 싶다면서 싸기까지 바란다면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다. 입질이 가지만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아쉬운 마음에 적당히 싼 가격이라도 적어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재수가 좋다면 낙찰받을 수 있다. 낙찰이 안돼도 신포도처럼 웃어넘기면 그만이고.
여하튼 난 그 건스모크를 반드시 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시세보다 조금 대범한 가격을 넣었는데, 내 기세에 밀렸는지(그럴리 없지만…)상대들이 일찍 떨어져 나가서 의외로 좋은 가격에(어쩌면 이전에 정크를 사서 고친 것보다 싸게) 낙찰받았다.
이미 있는 기판이라 그다지 물건을 받는 설렘은 없었다. 어쩌면 살짝 잊고 있을 무렵 건스모크 기판이 도착했다. 물건을 열어 보니 상태가 사진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조금 의심가는 부분이 있었는데, 사소한 먼지에 불과했다. 진짜 기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나 보다. 박스를 정리해서 버리려고, (이전에 모르고 함께 온 매뉴얼을 버린 적이 있어서) 꼼꼼히 포장지를 뒤지다가 프린트한 메모를 발견했다.
“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이런 아케이드 기판들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온 이 기판들을 다시 플레이해 줄 게이머들에게 팔고 있다. 부디 이 기판이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너를 만나 다시 플레이되기를 바란다. 고맙다. “
나는 몇 번이나 건스모크가 내 아버지와 연결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아버지가 건스모크를 플레이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온전히 건스모크를 즐기고 도전하도록 사랑해주셨기에, 건스모크의 순간순간마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메모를 읽는데 울컥하는 마음이 들더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시울이 젖으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의 마음이 긴 시간 떠돌다 나를 찾아 돌아온 기분이었다. 내가 껴안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은 누군가의 아버지가 보낸 건스모크 기판이 아니었다. 그건 어느새 내 마음이었다. 어느날 높은 산길을 힘겹게 걷다가 시원한 바람을 만나 행복해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던 것처럼, 순리처럼 다가온 평범한 마음이었다.
나이 50 넘어서 꺽꺽 거리며 원 없이 울었다. 이제 건스모크 이야기는 가슴에 묻고 그만 하련다.
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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