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7. 17:23ㆍ오락실 기판
고등학교 때 였을 거다. 그 시절에는 학교에 매여있어서 오락실을 자주 가지 못하고, 어쩌다 주말에 가서는 코인 러시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런 내가 오락 좋아하는 걸 한 녀석이 알고는 말을 걸었는데, 녀석은 속초보다도 더 촌에서 살다가 나름 유학온 녀석이었다. 그 놈 왈 자기 사는 동네에 좋은 오락실 있다며, 자신도 어릴 때 부터 오락 좀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원래 약간 허풍이 있는 친구였는데, 알고 봤더니 아버지가 의사였고 나름 사는 집안 녀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게 가정용 콘솔 이야기도 늘어놨는데, 워낙 관심이 오락실 게임에만 있고, 콘솔 게임을 얕잡아보던 시절이라 무시했다.
여하튼 녀석은 나랑 친해지고 싶었는지 자기 동네에 놀러 가자며, 그 오락실에는 큰 캐릭터에 버튼이 여섯 개나 되는 게임부터 네가 좋아하는 다른 캡콤 게임으로 커다란 버튼을 눌러서 하는 슈팅 게임도 있다고 꼬셨다.
그때의 나는 그저 캡콤 밖에 모르던 바보여서 속는 셈 치고 학교가 조금 일찍 끝난 어느 날 그 녀석 동네로 놀러 갔다. 그날이 내 평생 처음 속초를 벗어나 북쪽으로 거진, 혹은 간성에 갔던 날이었다. 갔더니 녀석의 집은 병원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은 의원이었다. 그 시절에 아버지가 의사였으니 녀석은 나름 금수저라 멍청해도, 쾌활했다 ㅋㅋ. 대충 부모님께 인사하고 사과 몇 알 주워먹은 후에 오락실을 향했는데, 과연 좋은 오락실이었다. 나는 어느 지역을 가든 오락실과 서점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지역은 촌이었는데도 오락실의 퀄리티가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단 몇 개의 오리지널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고, 대형 기기들도 있었다. 스틱이나 브라운관 상태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대망의 커다란 버튼으로 눌러서 하는 캡콤 게임은 바로 포가튼 월드(로스트 월드)라는 슈팅 게임이었다. 속초에도 없던 캡콤의 신작 게임, 게다가 독특한 컨트롤 방식에 나는 보자마자 사로잡혔다. 그날 그 자리에서 코인 러시로 엔딩을 보고 다시 고단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그 설레던 추억을 잊지 못해서 아직도 낯선 곳, 허름한 지역에 가면 깊은 숲 속의 유적처럼 멋진 오락실이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긴 시간이 흘러 내게도 짙은 나이테가 쌓이고, 살기 위해서 혹은 즐기기 위해서 수많은 게임을 스쳐가던 중에 우연히 포가튼 월드가 떠올랐다. 그 시절의 그 게임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세상이 훨씬 좋아졌으니까 어떻게든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물론 쉽게 공짜로 즐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마메의 몇 만 개의 롬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 시절처럼 완벽하게 포가튼 월드를 즐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젠 잊히고 사라진 수많은 아날로그 기기들이 필요했는데, 그중에서도 그 큰 버튼, 정확하게 캡콤 스피너라고 불리는 전용 버튼이 문제였다. 그러다 어떤 제작자들이 피시에 USB 입력용으로 제작했고, 나름 완성도가 높았지만, 특유의 묵직하고 부드러운 느낌까지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했다.
이런 와중에 레트로 붐을 타고 기판과 오리지널 캡콤 스피너의 가격은 계속 올라서 더 접근하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캡콤 스피너는 가격도 문제지만, 이젠 남은 물건이 별로 없어서 보기도 쉽지 않았다. 캡콤 스피너는 오로지 포가튼 월드만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라 공제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최근 아케이드 업계 최고 간판인 다크 소프트에서 캡콤 CPS1의 멀티 보드를 제작하며 다시 한번 포가튼 월드를 위한 캡콤 스피너 공제가 논의되고, 드디어 튀르키에의 제작자들에 의해 공제가 시작된다.
이 모든 과정과 순간들이 내겐 기적처럼 느껴졌다. 과거 우연히 주웠던 좁쌀만한 햇살이 나를 깨우는 기분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공제한 제품수는 고작 200개였다. 그 물건이 반년이 지나도 다 팔리지 않아서 난항이라니, 그마저도 기다리다 지쳐 취소하는 사람이 나와 어쩔 수 없이 수량을 채우지 못하고 제품을 완성, 한 달 전부터 발송했다. 그리고 평생을 기다린 그 제품을 나도 얼마 전에 받았다.
게임이 없다고, 못한다고 사람이 죽을까? 하고 싶은 게임은 언제나 있고, 늘 뭔가 하기를 갈망하지만, 이렇게 만나고 싶었던 것은 없었다. 그것은 게임이라기보단 추억이었고,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시대였다.
잃어버리고, 잊혀졌던...
푸르른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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