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z, 마법 기억하고 있습니까?

2022. 11. 13. 17:07오락실 기판

기판은 몇 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구매했다. 카피 기판이다.
상태가 엉망인 것을 세척했더니 그래도 볼만해졌다.

마법책이 타이틀 화면이다. 근사하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세이부의 실력.
바로 이 스테이지가 나를 늘 설레게했다.



1984년 언저리 겨울을 생각해본다. 그 시절의 내게 세상이란 집, 학교, 오락실, 만화방을 제외하면 모든 곳이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많은 눈이 내리면 내가 걸을 수 없는 곳 만큼 세상은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Wiz는 그런 겨울 날, 오락실에 들어가 몸에 내린 눈을 털고 언 손을 불면서 구경하던 게임이었다.

잘하던 게임은 아니었다. 당시 쏘고 피하는 정도의 게임성에 익숙했던 내게, 횡스크롤로 슈팅을 하며 셀렉트 버튼을 사용해서 마법책에 있는 마법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일은 어려웠고, 어떤 선택을 해도 개운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기한 캐릭터와 세계관, 중독성 넘치는 음악 때문에 갤러리가 되어 뒤에서 즐겁게 구경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좁은 선택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경험을 좋아하고 잘했지, 넓고 많은 경우의 수를 주는 게임은 잘 못했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게임(사실은 조금 더 복잡하다)으로 ASO라는 게임이 있는데, 그것도 영 서툴렀다.

게임 도중에 점프를 실수하면 죽는 게 아니라 아래로 떨어진다. 그곳의 풍경이 얼음과 눈 많은 겨울 풍경인데, 그 때문인지 이 게임을 생각하면 유독 겨울과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크리스천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크리스마스는 어린 시절 늘 신나는 단어였다.

어느새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불렀던 왬의 조지 마이클도 없는 세상, 아이엠에프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죽였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른의 겨울은 어느 순간부터는 회색빛이다. 그 꽉 찬 쓸쓸함도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붉은 wiz의 타이틀 화면을 보자마자, 잠시나마 그 시절의 어린 내가 되어 설레는 것, 과연...마법사에게 홀린 기분이다.

'오락실 기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1980년대  (0) 2023.03.18
달인왕, 장인이 꾸는 꿈  (0) 2023.03.03
flash gal, 오! 원더 우먼  (0) 2022.11.02
배틀 서킷, On your marks  (0) 2022.10.08
로스트 월드, 포가튼 메모리즈  (0) 2022.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