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8. 17:39ㆍ오락실 기판







윌로우란 게임에 추억은 없었다. 오히려 윌로우 영화에는 추억이 있다. 중학교 1학년에 만난 친구가 있었는데, 집이 제법 큰 광고집이었다. 아버지가 디자인을 위해 신기한 해외 잡지를 집에 많이 가져다 두는 바람에 그걸 보고 자란 친구의 센스는 대단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하교 후에 그 녀석 집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됐고, 자연스럽게 나도 친구를 따라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손의 재능 차이는 참으로 컸다. 내가 유치원생이면 친구는 고등학생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 대신 나는 다독과 많은 영화, 그림을 감상하며 시선의 높이를 올렸다. 잘 그리고 싶은 욕망은 인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커져서 청소년기의 나는 고민과 사색에 집중했다.
눈이 높아지자 손이 조금씩 따라갔지만, 더딘 성장은 괴로웠다. 차라리 눈이 낮았으면 어땠을까.
하여튼 친구는 천재였다. 그런 친구 역시 높은 열망으로 매순간 쉬지않고 그림을 그렸는데, (1주일에 연습장 한 권 정도의 양이었다.)그림 자료가 귀하던 시절 자료를 수집하려고, 당시에는 보기 힘든 영화들의 광고를 녹화했다. 그러다 어느 날 (주말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우린 주말마다 그 프로를 기다렸고, 녹화해서 몇 번씩이나 돌려봤다.
그때 몇 번이고 돌려봤던 소개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윌로우였다.
나와 친구는 스타워즈의 팬이었다. 그래봐야 국내에 발매된 스타워즈 대백과나 달달 외우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스타워즈의 창조자 조지 루카스가 제작하는 영화 윌로우는 당연히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물론 영화는 당시 하워드더덕처럼 어영부영한 영화여서 쫄딱 망했고 특별히 더 말할 건덕지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게임이 나온다. 그것도 캡콤의 게임이었다. 솔직히 이 시절의 캡콤 게임을 별로 안 좋아했다. NEMO나 메가 트윈스 같은 게임이 그랬다. 이전 캡콤 게임의 엣지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어설픈 완성도였다. 뭘 모르던 어린 시절에도 “이 친구들 이거 뭔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공장처럼 대충대충 만드는 구만”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다 기판을 수집하면서 오카모토 요시키를 알게 되고, 어쩌구 저쩌구 하다 윌로우란 게임을 구매했다. 대단한 평가를 받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귀한 게임 중 하나였다. 실패해서 별로 팔리지 못하는 바람에 기판의 양이 적고, 특히 이 게임에만 쓰이는 C보드 때문에 컨버전도 어려워서 그랬다.
나는 이 게임에 관심이 없었고, 평가도 별로였지만, 오카모토가 거의 마지막으로 디렉팅 한 작품이라 구매를 결정했다. 오카모토 자신도 크게 애착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원작 영화를 게임화 하면서 겪은 일이 꽤나 힘들었고, 당시 해산됐던 니시야마 타카시 팀의 직원들 일부가 자신의 제3 개발부로 편입되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구매해서 다시 해 본 게임은 의외의 면모가 보였는데, 무엇보다 애니메이션이 너무 부드럽고 훌륭해서 놀랐다. 소소한 아이템들의 구성이 정겨웠고, 보스전의 박력이 생각보다 좋았다.
비록 성공한 영화, 게임은 아니었지만, 오카모토 요시키라는 브랜드답게 기본은 하고도 남는 게임이었다. 결국 나 같은 오카모토 요시키 팬에게는 소중한 기판인셈이다.
특별할 것 없지만, 그리운...어느 일요일 오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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