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솔저, 소년 소녀를 만나다

2023. 9. 24. 10:19오락실 기판

 


중학 시절 어느 날, 하교하며 들른 밍키 오락실에는 처음 보는 게임이 있었다. 신작 게임이라니! 매 달 기다리며 사 보던 잡지나 신간 만화처럼, 그렇게 신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푸른 색감이 신비롭고, 멋진 그래픽의 게임이었다. 망설임 없이 스타트 하자 게임에서 만화영화처럼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그 음악이 얼마나 좋냐면, 아직도 이 음악을 들으면 설레서 이 게임을 처음 본 그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소위 레트로 게임이라는 취미에 빠져들면서 8비트 16비트 콘솔에 추억이 없던 내게는 오로지 오락실 게임만이 레트로 게임이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이식한 콘솔 게임을 사다가 에뮬을 하고, 결국에는 기판에 발을 들였다.

기판을 위해 가입한 카페에 내 소개를 하면서 올렸던 게임 구동 사진이 에뮬로 돌린 사이코 솔저 게임이었다. 물론 이게 내 인생 게임은 아니었지만, (사실 인생 게임이라는 말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내 인생의 어느 순간순간, 잊지 못할 장면을 만든 게임이었다. 최초로 오락실에서 울려 퍼진 주제가로 오락실 아이들을 모두 멈추고 바라보게 만들었던 추억, 인기가 없어서 금방 사라졌다가 몇 년이 지난 후, 심신이 지친 고등학교 시절, 걸어서 친구와 밤새 대화하며 하교하다 우연히 들어간 낡은 오락실에서 다시 만나 한참을 열중했던 기억, 대학교 동아리 방에서 술 마시며 놀다가 사이코 솔저를 아는 동기를 만나 밤새 웃고 떠들었던 기억.

한 번도 이 게임이 손손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많이 닮았다. 이 시절의 캡콤과 SNK가 오사카에 같이 있었고, 나름 라이벌 구도였기 때문에 분명 서로에게 이 시절부터 영향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성보다도 이 게임에는 당시 유행하던 초능력자를 다룬 서브컬처의 진한 향이 더 매력적이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바벨 2세부터 히지리 유키의 초인로크, 다케미야 케이코의 지구로처럼 선택받은 초능력자들의 우울하면서, 운명적인 서사를 작은 도트에 섬세하게 담았다.

2인용이면서 전혀 다른 캐릭터를 사용한 점도 대단하지만, 세세하게 다른 애니메이션을 넣어 캐릭터성을 부각하는 부분은 더 좋았다. 한 스테이지가 끝날 때마다 아래로 떨어지는데, 공중부양하다 아테나는 멋지게 착지하지만, 켄소가 넘어지는 장면은 백미다. 특히 2번째 스테이지에서 BGM에 맞춰 등장하는 작은 공룡과 코트를 입고 걸어오는 적은 마치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같은 뮤직 비디오, 혹은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리드미컬한 명장면이다.

이런 사이코 솔저의 기판을 구매하는 것은 필연이었으리라. 나는 이 기판의 국내 판매를 놓치고, 그 판매자에게 문의차 연락했다가 더 많은 다른 좋은 기판을 구매했다.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그래도 사이코 솔저를 갖고 싶어 해외를 돌아다니다 고장 난 기판을 비교적 싸게 2년 전에 구매했다. 그러나 비싸더라도 잘 구동되는 걸 구매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무려 2년에 걸쳐서 이 기판은 나를 괴롭혔다. 사실 기판을 고치는 과정은 늘 험난하지만, 특히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기술자에게 게임을 맡겼을 때 몇 번이고 되돌려 보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바로 이경우가 그랬다. 색이 이상하거나 스프라이트가 이상하거나 다시 또 색이 이상하거나 다시 스프라이트가 이상하거나. 무려 6,7번에 걸쳐서 기판이 오고 가면서 돈과 시간이 많이 깨졌다.

그러다 드디어 어제 완전한 모습의 사이코 솔저를 만났다. 몇 번이나 실망한 상태라 기대보다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기통에 기판을 물리고, 전원을 넣자. 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아테나가 완벽하게 움직인다. 투박하고 열악한 사운드 속에서 사이코 솔저는 끝없는 길을 달린다. 아테나라는 소녀를 다시 만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나. 오늘 이후 이 기판이 다시 엉망이 된다고 해도 괜찮다. 지나고 보면 모두 순간에 불과한 것을 영원히 붙잡으려 하지 말자. 그냥 이 순간이 기쁨이라면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자.

수년 혹은 수 십 년이 또 지나서 내가 오늘을 기억한다면, 사이코 솔저 속 아테나는 단순히 어렵게 고친 기판속 스프라이트가 아니라, 평생을 거쳐서 소년이 그리워한 무언가, 혹은 잡으려 했던 누군가, 이젠 기억조차 어렴풋한 사춘기 시절의 방황했던 어느 날...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