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덴, 왕좌를 찬탈하다

2024. 1. 23. 09:32오락실 기판

 

상태 좋다.
롬씰은 물론 AS씰까지 있는데, 잠마가 조금 깎여있다. 아쉬움.
카리스마 넘치는 타이틀 화면.
이 순간에 동전을 넣으면 난이도가 하락한다. 제작자가 숨겨둔 깜찍한 치트.
난생 처음 원코인으로 6스테이지 까지 간 점수.

 
1990년 4월 세이부는 슈팅 게임 라이덴을 발매했다. 토아플랜의 1987년 비상교, 구극타이거, 1988년 타츠진, 1989년 교교교 그야말로 토아플랜 전성기에 도전을 한 것이다. 
 
시스템은 구극타이거를 더욱 심플하게 줄여서 샷은 두 종류, 폭탄은 구극타이거와 같은 한 종류, 유언폭탄이었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유래 없는 기체의 디테일과 수준 높은 사이언스 픽션 디자인, 듣는 순간 클래식이 될 운명의 BGM까지 게임의 외관은 당대에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년간 집권했던 토아플랜식 슈팅의 피로감을 그들의 방식을 따라해서 이겨 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존재했다. 실제로 토아플랜 역시 자신들의 매너리즘을 떨치려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던 중이었다. 
 
결과는 높은 평가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슈팅게임으로, 세이부는 단숨에 슈팅게임의 왕좌를 차지한다. 돌이켜봐도 당시 오락실에 라이덴이 깔리지 않은 곳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국내의 그 기판들은 거의 복사였을 것이다. 아케이드 데이터 베이스를 찾아보면 당당하게 복사버전이 코리안 부틀레그라고 적혀있고, 남아있는 복사기판의 자료(영상, 웹)는 거의 코리안 부틀레그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그렇게 빠져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밤 10시에나 귀가하는 고등학생 시절이라 오락실에 갈 시간이 거의 없었고, 가더라도 가끔 그래픽이 멋있어서 즐겼는데, 게임이 어려워서 3스테이지 정도를 갔던 것이 전부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판을 수집하면서 나뿐 아니라 오락실 세대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게임이 라이덴이었으리라. 라이덴2를 먼저 구하고, 오랫동안 라이덴 1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국내에서 판매하는 글을 보고, 당시에는 조금 비싸다는 생각으로 구매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이었다. 가격이나 가치 이런 걸 떠나 라이덴 1은 점점 상태 좋은 놈을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전에 했던 게임들을 이 시대에 다시 기판으로 구동하면 대개의 게임들은 놀랍게도 그 시절에 느낀 그 기분을 그대로 전해준다. 그러니까 좋은 건 여전히 좋고, 구리고 싫은 건 여전히 구리고 싫더란 말이다.  물론 수십년을 알고 지낸 게임이니 좀 하다 보면 질리긴 하지만 인상은 그렇다.

라이덴 1 역시 그 때의 라이덴 그대로였다. 당시에도 난공불락이었던 난이도, 이제 여유가 생겨서 찬찬히 뜯어보는 중인데, 이 게임에 대한 호감이 수직으로 상승 중이다.

라이덴 1은 대중예술의 끝판왕이다. 대중의 눈높이로 만들어 비평가들의 입맛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다 갖춘 셈이다. 가장 극적인 부분은 이 정도에 근접 한 슈팅 게임을 단 한 번도(허접한 에어 레이드는 빼고) 내지 않았던 세이부가 단숨에 최고 수준의 게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토아플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라이덴 1을 다시 플레이 하면서 이 게임이 구극타이거와 타츠진, 교교교를 모두 조금씩 닮았다는 부분에서 정말 신기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총합, 라이덴이 마치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아류가 아니라 오리지널로 보이는 게 그야말로 신들린 밸런스, 아류라는 낙인을 뛰어넘을 깊은 완성도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모든 부분이 다 너무 대단해서 그들은 3년 후 다음 작인 라이덴 2에서 완전 새로운 속편보다는 라이덴 1의 동어반복, 리메이크에 가까운 작품을 만든다. 그들 조차 넘기 힘든 산이었을까. 라이덴 2는 라이덴 DX로 한 번의 조정을 거치고 세이부의 2D 도트 라이덴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비슷한 시기, 1989년 주윤발 이수현이 주연했던 오우삼 감독 걸작, 첩혈쌍웅을 정점으로 홍콩영화는 사실상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그 한 작품 안에서 두개의 장르가 만나는데, 홍콩영화를 주름잡던 주윤발의 누아르와 이수현의 경찰영화는 당대 최고점에서 서로 장렬하게 싸웠고, 최고 작품으로 산화한 이후 홍콩 누아르라는 장르는(이수현의 경찰영화도) 천천히 사라진다. 

라이덴 1은 사실상 토아플랜의 유전자가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토아플랜의 유전자를 껴안은 세이부의 괴물이 2만장의 판매고로 슈팅게임 역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을 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 걸작이 클래식 슈팅 게임 혈통의 마지막 왕으로, 곧 슈팅 게임이라는 장르가 대중적, 상업적 절정을 지나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이후 오우삼과 주윤발은 양조위와 첩혈속집을 하나 찍고, 헐리우드로 넘어가 새로운 커리어를 이어간 것처럼 라이덴 이후의 슈팅 게임들은 이전처럼 대중에게 큰 히트 작품을 내지 못하다 탄막등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며 슈팅의 지평을 넓힌다.
 
인생 역시 꽃과 같아서 절정이 지나면 저물 수 밖에 없다. 부정하려 해도 내 몸은 이미 만개한 시기를 지났고, 그와 함께 정신도 허약해진 것을 느낀다. 당연히 영감도 줄었으며, 세상을 놀라게 할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재능도 없다. 이럴 때 왜인지 포기보다는 터무니없게 세이부의 라이덴이 떠오른다. 
 
나는 라이덴이 엄청난 재능만으로 만든 게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꾸준한 도전과 응전이 만들어낸 집념의 응집물이다. 라이덴은 신이 만든 천지개벽의 명작은 아니지만, 인간이 신을 따라 도전하고 승리했던 오늘도 여전히 활활 불타는, 클래식 슈팅 최후의 왕이다. 
 
 
 
사족 1: 대학시절 오락실에서 라이덴을 굉장히 잘하는 게이머들이 모두 파란색 2P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알고 보니 2P로 게임을 했을 때 난이도가 훨씬 내려가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그뿐 아니라 데모 중 우주 화면에서, 1p가 폭탄을 터뜨릴 때 동전을 넣으면 난이도가 한 단 계 더 내려간다. 이는 세이부에서 우연히 그 타이밍에 동전을 넣은 게이머가 영문도 모른체 쉬우니까 평소보다 잘하곤, 그 때문에 본인의 실력이 늘었다 착각해서 다음에 또 동전을 넣고 도전하게 만든, 일종의 치트이자 함정이라고 한다. 
 
사족 2: 이시기에 나온 슈팅 게임들의 난이도가 높은데, 연사 버튼을 사용하면 납득할만한 난이도가 된다. 물론 그런 피지컬까지 모두 생각하고 만든 게임이겠지만, 연사가 있다고 쉬운 것도 아니고, 맞추고 피하기에만 집중할 수 있어 훨씬 즐거워진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고 난이도의 슈팅게임들은 그래서 이 연사기능이 있어야 오히려 완벽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족 3: 대학시절 동아리 후배가 이른 아침에 등교했다가 시간이 남아 한산한 오락실에 들어갔는데, 웬 잘생긴 놈이 홀로 라이덴을 하고 있어서 봤더니 장동건이었다고...ㅋㅋㅋ 갑자기 그 시절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