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28. 17:38ㆍ생각
한 달 전에 우연히 킨텍스에 오락하러 오라는 말을 전화로 듣고서 마음이 설렜던 것 같다.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그 시간 이후로 나는 아내에게 말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일정을 조율하고 이틀에서 사흘 정도를 비웠다.
사람 사는 세상 어디 만만한 게 있겠나. 작은 파도부터 큰 풍랑까지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지만, 월말에는 오락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는 상상으로 위안 삼았다.
아내에게 말하자, 아주 쉽게 승낙했고, 일정이 좀 힘들지 않겠냐는 걱정을 들었다. 며칠씩 쉬면 아내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게 늘 미안하다. 같이 여행이나 전시회를 가보지 못한 게 벌써 몇 년째인가.
그래도 이 시간은 양보하기 싫었다. 설사 아내가 화를 내도 이번에는 허락보다 용서를 받아서라도 갈 셈이었다.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오락실 꼬마는 너무 오랫동안 오락실을 떠나 있어 숨이 찼다.
기왕에 서울 올라가는 거 며칠 있을 작정이어서 일정이 끝나면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한다. 서울 오면 꼭 연락하라는 말이 예의였을 수도 있지, 그래서 무난한 노총각 녀석에게만 미리 연락했다.
"이번엔 오는 거 맞죠?"
짜증 나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서울에 올라가는 날이 결국 다가왔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알 수 없는 몸살도 같이 왔다. 젠장젠장젠장젠장!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붓고 충혈됐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딱히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재수가 더럽게 없던 거지. 몸살이라지만, 조금 몸이 무거웠지만 아프지 않았고, 눈도 금방 괜찮아질 것 같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내 꼴에 아내는 솔직하게 배꼽 잡고 웃더라. 몇 년 만에 혼자 놀러 가는데, 맞춰서 찾아온 불행이라니, 블랙 코미디 같았나 보다.
몸이 좀 불편했지만, 솔직히 올라가는 길은 제법 신났다. 혼자 이런저런 상상에 히죽히죽 웃으면서, 혹시 할지 모를 버추어 파이터 4 동영상도 찾아서 봤다. 무려 20년 전에 했던 게임이다 기술이고 콤보고 전혀 기억이 없었다. 오프라인 버파 대전이라니 벌써부터 몸이 부들거린다.
도착한 플레이 엑스포, 친구 아카다 덕분에 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호의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내가 뭐라고 대접을 받는가, 단지 같은 시대를 향유하고 비슷한 오락실을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푼다.
시연장은 엄청나게 넓고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별천지에서 온듯한 코스어, 어쩐지 나와 비슷해 보이는 젊고, 늙은 다양한 게이머들. 그 속에 내 관심사인 레트로 게임의 부스를 만들고 시연 중인 카페 회원들이 있었다. 정말 대단한 물량과 열기였다.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 정보가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눈에 익었던 회원들의 부스를 바보처럼 스쳐 지나갔나 보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방문기를 보니 어째서 놓쳤나 싶은 곳이 많았다.
아카다님이 야심 차게 만든 크레이지 택시를 플레이했다. 과연 아카다만의 꼼꼼함이 잘 반영된 기체였다. 하지만 크레이지 택시를 아케이드보다 드림캐스트와 패드로 즐겼던 탓에 핸들과 기어 조작이 어색해서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원작에 없는 핸들 진동이 생각보다 훌륭했다. 그리고 이어서 크레이지 택시 대신에 이니셜디 2를 구동했는데, 그게 대박이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보이는 친구들이 줄 서서 덤비기 시작했다. 내가 80년대 90년대 아케이드 게임을 추억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이니셜디 2가 그런 게임이었던 것이다.
몇 번을 플레이하고도 얼굴에 여운이 남아있었다. 그리곤 얼마나 자신이 그 게임을 사랑했고 미쳤었는지 늘어놓았다.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네가 무슨 말하는지 다 안다. 웃음이 나왔다.
어지러운 데다가 몸상태도 별로라 눈에 익은 부스만 몇 번 돌아다녔다. 그 동선에서 만나는 카페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버추어 파이터 4 파이널 튠드를 했다. 가기 전에는 에볼루션이 있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파이널 튠드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거의 가동되지 않았던 게임이다.
아쉽게도 디스플레이에 약간의 인풋렉이 있었지만, 마치 메갈로 같은 기통에서 사람 옆에 앉아 대전 하는 것은 집에서 온라인만으로 혼자 즐기는 것과는 재미의 차원이 달랐다. 그래 이맛이지.
저녁 6시가 되어 토요일 일정이 끝나고는 콜플씨의 주도로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카페 회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컨디션이 별로여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됐지만, 이들과 어울려 나누는 시간의 행복이 그런 걱정을 지웠다. 옛날 오락실 다닐 때 친구들처럼, 다 친하지는 않아도 저마다 친절하고 재밌어서 좋았다.
그리고 후배가 사는 홍대입구에 가서 조금 더 놀다가 잠을 자곤, 다음 날 내려왔다. 이미 시간을 빼놨기 때문에 서울에서 다른 친구를 만나거나 아예 플레이 엑스포를 한 번 더 가도 됐지만, 그냥 떠났다.
뭐랄까, 꿈같은 시간이었는지만, 어느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거기에 더 머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오락실 인생은 아마 20대 후반까지였을 것이다. 버파 4가 벌써 20년 전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나. 그 후로도 오락실을 좋아하고 즐겼다 생각했던 건 단지 미련이었을까.
내려가는 차에서 서울 살던 아내와 연애하며 수없이 다녔던 홍천, 인제 길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보았다. 그 길가에 피어있던 가장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기억한다. 아내는 코스모스를 좋아해 언젠가는 그 길에서 차를 한참 세운 적도 있었다.
버스 의자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자, 저만치로 어린 꼬마가 멀어진다. 청년이 되어도 여전히 불안정하겠지만, 괜찮다. 그 길에 맑은 날, 궂은 날, 온갖 시간들이 이어지더라도, 결국 너의 길에 코스모스는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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